지난 1일 미국 미시간주의 캘러머주대학에 서류 봉투가 배달됐다. 며칠 전 “귀 대학에 기부하려는 사람이 있다. 신원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기부금을 우편으로 보내겠다”는 전화를 받은 터다. 봉투가 도착한 날은 만우절.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봉투를 연 교직원들은 100만달러짜리 수표 2장(약 27억원)에 환호했다. 기부자는 동봉한 편지에서, 보낸 돈 중 절반은 여성과 소수인종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익명 기부에 즐거운 美대학들

요즘 미국 대학가에서 ‘키다리 아저씨’가 화제다. 진 웹스터의 소설에 나오는 고아 소녀 주디의 후원자처럼 익명의 기부자가 적잖은 대학에 ‘즐거운 충격’을 안겼다. 두 달 사이 최소 13개 대학이 모두 7000만달러(약 939억원)의 ‘선물’을 받았다. 기부받은 금액은 노스캐롤라이나대 애슈빌캠퍼스의 150만달러(20억원)에서 미시간주립대의 1000만달러(134억원)까지 다르다. 미국 대학들은 익명 기부를 받더라도 기부자가 누구인지 파악한 뒤 비밀을 유지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부자의 신상은커녕 개인인지 단체인지도 모른다. 로펌이나 은행을 통해 수표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천사’는 누구일까. 키다리 아저씨의 ‘기부 코드’를 읽어내는 게 그에 접근하는 첫걸음일 것 같다. AP통신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기부금을 받은 13개 대학은 모두 여성 총장을 두고 있다. 일부 총장은 인종·민족적으로도 소수파다. 인디애나주 퍼듀대의 여성 총장인 프랜스 A 코르도바는 멕시코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캘러머주대의 에일린 B 윌슨-오옐라런 총장은 이 대학 최초의 여성 총장이자 최초의 흑인 총장이다. 익명의 독지가는 또 기부금을 여성·소수인종 학생에게 써달라고 요청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기부자가 여성일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인터넷 대안언론 ‘올터넷’은 매들린 올브라이트·힐러리 클린턴 전·현 국무장관과 배우 우피 골드버그, 조디 포스터 등이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부한 것 아니냐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지원받은 대학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13곳 중 12곳이 주립대라는 점이다. 이들 대학은 최근 경기침체로 각 주정부의 교육예산이 삭감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에 시달려 왔다.

‘기부천사’의 코드는 여성, 소수자, 공교육으로 집약된다. 그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누가, 그리고 무엇이 핵심 목표가 돼야 할지 시사점을 던진다. 위기의 시대에는 비주류·소외계층의 삶이 더 팍팍해진다는 것, 하여 이들의 삶과 배움을 부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 말이다. 600만달러(80억원)를 기부받은 빙햄튼대의 로이스 B 드플레어 총장은 나눔이 퍼뜨린 희망의 힘을 말한다. “빙햄튼 시민들은 이민자센터 총기 난사 사건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이번 기부로 ‘세상에는 선(善)도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뉴욕타임스 인터뷰)

퍼질수록 좋은 ‘나눔 바이러스’

기부자가 누구면 어떠랴. 올브라이트도 좋고 골드버그도 상관없다. 철 없는 재벌 상속녀 패리스 힐튼의 개과천선도 나쁘지 않다. 남성들의 비밀결사라면 그것도 신선하겠다. 빌 게이츠 같은 ‘자선 황제’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부자들이 뜻을 모았다면 금상첨화다. 성별이야 어떻든, 가진 자·배운 자가 못 가진 자·못 배운 자와의 경계를 허물려는 노력은 아름답다. 돼지인플루엔자 같은 몹쓸 바이러스 말고, 나눔 바이러스만 태평양을 건너왔으면 좋겠다. 등록금으로 고통받는 여대생이 눈물의 삭발을 해도, 부자들이 눈길 한 번 안 주는 이 땅을 향해.

<김민아 | 국제부 부장대우>